097. 자격에 관한 의심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내가 가진 자격에 대해서 내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아직 인증 받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서 누군가가 나의 상태를 파악하고 나를 등급 매겨서 어느 정도의 일을 시킬 수 있다고 성적표를 발행해주기를 기대했다.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증세는 지방출신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졌다. 같은 문제가 주어졌을 때, 서울 사람들은 실력도 없고 아직 그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대답하고 일을 따낸 다음에 공부하고 그걸 또 해낸다. 품질과 상관없이 일단 해 낸다. 지방 출신들은 이미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일을 맡겨도 “아이구 제가 그걸 어떻게…” 하면서 발을 뺐다. 잘 하면서도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선 볼품없는 결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에게 음반 속지를 써 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나는 음반의 속지를 보며 음악을 듣고 공부했기 때문에 그 일이 엄청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은 대단한 음악 평론가나 팝 칼럼니스트가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이구 제가 그걸 어떻게…”라며 일을 고사했다. 그리고 일을 해내진 못했어도 나에게 그런 일이 들어왔다는 자체에 감격했다. 서울에 오니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몇 년 더 열심히 하면 음반 속지를 쓰는 전문가가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몇 년 뒤에 내가 좋아하는 음반의 속지를 쓴 사람을 만났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시시했다. 이런 사람들이 속지를 썼구나, 모두 전문가가 쓰는 것은 아니었구나, 그다지 아는 것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쓸 수 있지? 라고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은 내가 할 만하다 생각한 사람이 주었으니 내가 해도 괜찮은 일이었고, 내가 쓴 글이 문제가 될 정도로 못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일이 갔을 거고, 내가 쓴 글이 썩 나쁘지 않으면 그대로 나갔을 것이다. 음반 속지를 가지고 이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냐고 따지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속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세계문학전집의 각 책들을 펼쳐보아도 번역을 누가 했는지 그 사람이 어떤 자격을 갖추었는지 상세한 설명이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나의 자격에 대한 자격지심, 나 보다 좋은 스펙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를 나락으로 빠뜨려 스스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 네가 적격자야, 그 정도면 충분해” 이런 말을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얘가 이걸 왜 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나타나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거.

자신감 혹은 자격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가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전문가인가 보다 하고 보게 되지 왜 저 사람이 저기서 일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어제 신던 양말을 또 신고 왔는지, 전세를 살고 있는지 월세를 살고 있는지, 유학을 갔다 왔는지 지방대를 나왔는지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쳐다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글쓰기를 위해 장비를 사거나 장소를 섭외하거나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니 꽤 검소한 활동인 것 같은데, 비싼 취미를 하는 것처럼 대놓고 자랑하지 않는다. 비싼 취미를 하는 사람들은 돈 많이 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글쓰기는 무엇을 부끄러워하나. 아직도 나의 자격 문제를 생각하는 내가 문제다.

(원고지 9.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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