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필사하기

최근에 필사를 시작했다. 손으로 글자를 따라 쓰다보면 뭔가 꿈틀꿈틀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 분명하지 들리지는 않지만 무엇인지 모를 어떤 생각들이 새싹처럼 자라나는 느낌이다. 어떤 느낌, 어렴풋한 어떤 것, 간질간질 기억날듯 말듯 살짝살짝 고개를 들고 봐달라고 애쓰는 것 같다.

글을 쓰는 동작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떤 작가의 완성된 글을 단순하게 베껴 쓰는 동작일 뿐인데, 쓰다보면 집중하게 되고 집중하다 보면 딴 짓을 하고 싶어지는데 이때의 딴 짓이 베껴 쓰는 말과 다른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지, 하고 싶었던 말인지 모르겠지만 베껴 쓰는 책과 다른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느낌이 드는 타이밍이 왔다.

그것을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은 글쓰기도 잘 된다. 평소에 생각이 있었든 분야나 단어는 술술 말이 잘 나왔지만 어떤 단어는 무겁게 느껴져 너무 말이 길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쓰기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작가의 생각과 다른 나의 이야기 혹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냥 마냥 딴 짓을 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았다. 쓰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는 무슨 말을 따라 쓰는지도 모르고 그냥 글자만 꾹꾹 눌러 따라 쓰는 경우도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게 뭔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한 분량을 끝내고 나면 이제 내 맘대로 써보자 하고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이제 좀 쉬자 하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 드러눕기도 했다. 어느쪽이든 좀 더 수월하게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운동하는 사람들, 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루에 열 시간 연습하는 것 보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꾸준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한다. 수도승의 기도나 운동선수의 몸풀기 운동처럼 내 몸을 깨우고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원고지 5.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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