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묵묵히 걷는 구간

밤이 깊었고 집까지 가는 길은 아직 많이 남았다. 비가 내린다.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점점 거친 비로 바뀌고 있다. 버스에서 내렸지만 아직 언덕 골목길을 더 걸어야 한다. 감기 기운이 때문인지 몸도 으슬으슬 한기가 온다. 오늘따라 어깨에 맨 가방도 무겁다. 괜히 구두를 신었나. 오늘 같은 날 운동화였으면 더 좋았을걸.

비가 쏟아진다. 우산도 없다. 편의점은 이미 지나왔다. 다시 갔다 올까. 비를 맞고 다시 골목을 내려가 우산을 사서 올라오는 것 보다 그냥 비 맞으며 집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미 너무 지쳐서 다시 올라올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은 빌라 입구에, 담벼락 아래에 급한 대로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비라면 잠깐 쉬었다 가도 좋겠지. 우두커니 비를 맞고 있을 수는 없다. 계속 길을 가든지 담벼락이든 대문 앞이든 비를 피할 곳을 찾든지 해야 할 것이다. 비에 젖은 몸이 바람 때문에 더 춥게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걷지 않으면 집에 도착할 수 없다. 요령껏 잠깐 쉴 수도 있겠으나 그곳이 목적지는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무식한 방법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뿐이다.

혹시 이 방법뿐일까? 다른 더 편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 마중 나올 수도 있겠고,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수도 있겠지. 지긋지긋한 이 동네를 아예 떠나는 것도 좋겠고. 그렇지만 지금은 마중 나올 사람도 없고, 이사 갈 형편은 못된다.

뚜벅뚜벅 그렇게 걷다 보면 집에 도착하겠지. 누가 뭐라고 해도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지. 잘 아는 이야기지만 혹시 다른 방법이 있을까 생각해 보는 거야. 그렇지만 생각을 하더라도 걸으면서 하는 것이 좋다. 걷지 않고 생각하는 만큼 집에 늦게 도착할 테니까.

(원고지 5.15장)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