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4. 연필

연필을 깍는다. 끝이 뾰쪽한 것은 글씨 쓰기가 좋고 끝을 납작하게 하면 멋 부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가 좋다. 끝을 뭉툭하게 하면 넓게 고르게 색을 입힐 때 좋다. 여러 겹으로 덧 씌우면 명암 조절이 된다. 연필을 깍으면서 끝 모양을 어떻게 할지, 길이는 어떻게 할지, 손이 닿는 부분을 길게 할지 짧게 할지 결정한다. 연필심을 너무 길게 깍으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짧게 깍으면 쓰기가 답답하다.

연필을 깍을 땐 칼을 정성스럽게 놀리지 않는다. 정성스럽게 연필을 깍으면 연필을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쁘게 깍기 위해 애쓰게 된다. 한쪽으로 너무 기울게 깍이진 않았는지, 연필심이 한쪽으로 쏠리게 깍이진 않았는지 신경쓰면서 깍으면 공예품 처럼 연필을 깍게 된다. 연필 깍느라 공을 들여서 막상 연필을 쓸 때가 되면 쓰기가 아깝게 느껴진다. 금방 닳아 없어질 것 같기도 하고, 애써 깍아 놓은 것을 망가지는 것을 감수해야한다.

연필은 손때가 타고 끝이 뭉개지고 부서지기도 하면서 짧아진 것들이 좋다. 더 정이 간다. 자주 쓰는 연필은 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든다. 같은 연필이어도 자주 쓰던 연필이 더 친한 느낌이 좋다. 그리고 연필통에 연필을 가지런히 뉘어 놓으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놓고 보는 연필 말고 출동 대기 상태로 기다리는 연필이 보기 좋다.

(원고지 3.7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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